[스크랩]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
이 책의 원제는 '세상은 얼마나 복잡한가'였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물론 지면상에서는 아니다. 저자와의 만남 자리에서 들은 얘기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복잡'이라는 어휘가 두려웠던 모양이다.
중학생 선정도서라서 멀리 두었던 책을 기회가 있어 읽어 보았다. 물리학은 내게 멀고 먼 지평선-사실 고등학교 물리시간은 교사도 학생도 혼돈 그 자체였다-이었는데 이렇게 생활 속에서 찾는 과학을 읽으니 우리 근처 곳곳에 과학은 숨쉬고 있는 것이었다. 비교적 신세대인 저자가 전하는 과학은 옆에서 얘기해 주듯이 친밀감 있는 과학이었다. 내게는 '정재승의 과학 우화'같은 느낌이었다. 우화 한편 한편이 내 곁에 바로 다가서 있었다.
그의 콘서트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1악장은 머피의 법칙, 어리석은 통계학, 웃음의 사회학, 아인슈타인의 뇌라는 형식으로 연주된다.
로버트 매튜스가 약간의 수학으로 증명했던 머피의 법칙을 통해 저자는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일까? 세상에는 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이 훨씬 더 많다. 더 나은 상황이란 언제든지 있기 마련이니까. 일이 안 될 때마다 우리는 머피의 법칙을 떠올리며 '나는 굉장히 재수가 없구나'라고 생각하지만, 로버트 매튜스의 계산은 그것이 '재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어쩌면 우리가 그동안 바라왔던 것들이 이 세상에게는 상당한 무리한 요구였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머피의 법칙은 세상이 우리에게 얼마나 가혹한가를 말해 주는 법칙이 아니라 우리가 그동안 세상에게 얼마나 무리하게 요구했는가를 지적하는 법칙이었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늘 재수 없음을 느끼고 살았으니 내 욕심이, 어리석음이 꼭 그 크기였음을 인정한다. 이렇게 이솝우화처럼 우리들에게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며,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 얻을 것이 무엇인지를 유연하게 전해주고 있다. 아마도 앞으로 나는 은행의 현금 자동 지급기 앞에서 저자의 표현을 빌어서 말하면, 눈동자를 바삐 굴리면서 쪼잔한 머리를 굴리면서 서 있지는 않을 것이고, 나비 효과처럼 자동차의 흐름을 막는 차선 바꾸기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조금은 과학적 인간이 되었으니까.
머피의 법칙을 시작으로 과학 우화는 계속된다. O.J. 심슨 사건 같은 어리석은 통계학에 속아 넘은 판결의 에피소드를 들면서 우리의 직관과 상반되는 확률의 기막힌 역설을 제시하며, '토크쇼 방청석에는 왜 모두 여자일까'라는 당연한 것 같은 물음도 던진다. 소크라테스의 대화처럼 우리를 이야기 속으로 계속 끌어낸다. 왜일까? 여성들이 한가한 시간을 갖기 때문에? 그럼 한가한 남자도 몇 명은 있을 법한데.
몇 명의 남자가 있을 때보다 모두가 여성일 때가 웃음은 더 크게 나온다고 한다. 이것은 경험론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과학적으로 뇌를 분석하면 전두엽하단-웃음 관련 부분-은 여성이 발달되어 있다고 한다. 고등동물일수록 발달한다고 하니 여성이 남성보다는 우월함을 잠시 느껴보나, 나 개인적으로 웃음이 부족한지라 덜 고등동물임을 느끼기도 한다. '세상에서 가장 심하게 고통 받는 동물이 웃음을 발명했다'고 말한 니체의 말처럼 인간은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었다. 많이 웃을 일이다. 또한 저자는 아인슈타인의 뇌가 15%도 채 다 사용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 터무니없는 과학의 거짓말이라고 말하면서 그동안 하잘 것 없던 우리의 뇌에 대한 위안을 주기도 한다. 그럼 그렇지 아무렴하는 통쾌함의 심보도 잠시 가져 보았다.
콘서트는 2악장으로 접어들며 느리게 캔버스에서 카오스를 발견한 현대 미술가 잭슨폴록을 섬세하게 연주해주면서, 과학은 아직도 내게 해결되지 않았던 잭슨폴록의 작품들을 완전히 내게 돌려주었다. 무작위random로 그려지는 그림 같지 않은 그림, 미치광이의 그림은 처음에는 난해함 그 자체였다. 그것이 어느 날은 내개 라벤더 정원으로 와 닿았다. 정은미의 <몬드리안의 조선의 보자기를 본다면>에서 '그의 걸작 중 하나인 <No.1>에는 힘 있는 색채와 얽힌 선들의 만화경의 펼쳐진다. 커다란 그림은 평온을 줄 뿐만 아니라 마치 안개 속같이 몽롱한 라벤더 정원 속을 걷는 듯한 신비로운 환상도 준다'. 이후로 잭슨폴록의 그림은 더 이상 숨은 그림 찾기가 아니라 평화로운 정원이 되어 내게로 왔고, 이 콘서트에서 물리학적 규칙 속에 그려진 작품은 완벽한 현대 미술로 내게 다시 태어났다. 더 이상 무지가 아닌 설렘이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항상 보랏빛 환상 속에 쌓여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저자는 ‘서태지의 머리에는 프랙탈-자세히 들여다보면 세부 구조들이 끊임없이 전체 구조를 되풀이 하고 있는 형상-이 산다’고 얘기해주며 프랙탈 구조를 통해 아프리카 문화를 소개해 주기도 한다.
'세상에는 우월한 문화도 열등한 문화도 없다. 다만 살기 위해 적응한 다양한 문화가 있을 뿐이다'라는 클라우드 레비스트로스의 말도 같이 전하고 있으나, 이 부분에서는 어떤 씁쓸함 같은 것이 나를 감아 들었다. 그것은 위안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역사도 강자들에 의해서 서술되듯이, 문화 역시 강자의 손을 벗어나 동등한 위치가 가능할 것인가라는 회의가 일시에 몰려온다. 과학의 증명을 통해 가능한 것인가. 아닐 것이다. 과학은 단지 증명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진짜 다양한 문화로 접속되기 위해서 과학이 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일까? 그 접속의 매개체를 어디서 구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문화의 예를 들자면 참으로 많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만도 지역마다의 문화가 다른데, 우리는 그 문화를 모두 긍정적으로 다양함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한 작은 예를 들자면, 예전의 제주도 똥돼지에 대해서이다. 사람들은 말할 때마다 조금의 비아냥거림과 조금의 스스로의 우월감들을 보이면서 말하곤 했었다. 조금은 진저리 치듯이 말이다. 제사의 예법에 있어서도 다른 집안의 예는 쌍놈의 것이 되어 버리는 실정이다.
우울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파레토 법칙-상위 20% 부자들이 80% 이상의 소득을 독점하고 있는 현상-은 거의 레퀴엠이 되어 무겁게 흐른다. 파레토의 법칙은 경제적인 불평등이 거부할 수없는 자연의 법칙이자 인간의 숙명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 같아 씁쓸함을 남긴다. 여기에도 물리학자들은 해결책으로 약간의 희망의 말을 남긴다. 시스템의 동역학적 특성을 연구하는 물리학자들은 '파레토의 법칙'이 경제적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아니라 시스템을 재정비 하도록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사이렌 역할을 했다고 믿는다. 이제 그들이 해야 할 일은 파레토의 법칙이 성립하게 된 원인을 규명하고, 어떻게 시스템을 변화시켜야 경제적으로 정의로운 분배가 이루어질 수 있는지 연구하는 일이다. '인간의 법칙은 변화할 수 있는 법칙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오라기 희망을 던지고 있지만 내게는 왠지 달나라만큼의 거리감으로 다가 올 뿐이다. 고도의 성장은 늘 불평등을 가속화해 왔고, 늘 기득권의 권리를 더해 왔을 뿐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에 빠진 자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라도 기다려 본다.
콘서트 1부 끝. 2부는 잠시만..... 좀 쉬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