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구나. 신타로는 나의 현실도피였구나. 차분한 기분으로 생각했다. 현실을 마주 보는 게 싫어서 나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남자를 짝사랑하며 시간을 잊어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이게 모라토리엄이다.’(70쪽)
여기서 ‘신타로’라는 청년은 전통 있는 문구 제조업체에서 일하는 신입사원입니다. 얼짱, 몸짱에다, 나이는 스물두 살입니다. 신타로의 지도사원으로 선정된 소설 속의 주인공은 입사 13년 차로 올해 서른네 살인 미혼여성 고사카 요코입니다. 두 사람은 12년이나 벌어진 띠동갑입니다. 이번주 권해드리고 싶은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집 ‘걸(Girl·북스토리 출간)’에 실린 첫 단편입니다.
요즘 짝짓기를 할 때 연상녀, 연상남은, 시쳇말로 뉴스도 아닙니다. 적어도 10살 차이는 돼야 사랑의 전압이 떨린다 싶습니다. 조용하던 문구 회사에 어느 날 신타로라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완벽한 남자 사원이 입사하자 그 회사에 있는 젊은 여사원들은 금세 난리가 납니다. 이른바 ‘킹카의 효과’가 사내 여사원들을 흔들어 놓습니다. 모두들 일부러 용무를 만들어서 신타로의 책상 앞으로 모여들고, 그 앞에서는 최대한 예쁜 표정으로 웃고 다니고, 목소리도 평소보다 한 옥타브 높아집니다(12쪽).
신타로의 지도사원으로 임명된 고사카는 다른 여사원들이 신타로를 유혹하려 들 때마다 앞장서서 이를 차단합니다. 신타로가 다른 여사원과 퇴근 후 함께 있기라도 하면 고사카는 침착함을 잃고 질투심에 허둥댑니다. 고사카가 보기에 신타로를 둘러싸고 있는 다른 여사원들은 그를 독차지하려는 특공대요 자살테러범으로 보일 지경입니다. 그러다가 신타로의 팔짱을 끼고 면사포를 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합니다.
김광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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