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입력시간 : 2007.05.02 00:35
- 야외용 돗자리 대충 깔고 누운 신애(전도연)의 얼굴 위로 경남 밀양의 햇빛이 수직으로 내리꽂힌다. 이 은밀한 햇빛(密陽)과 신애 사이에서 숨을 헐떡거리는 사내는, 점잖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약국 집 주인. 교통사고로 남편을 보낸 데 이어 얼마 전에 자식까지 잃은 여자가, 사랑의 감정이라고는 어림 반 푼어치도 갖고 있지 않은 남자 밑에서 다리를 벌리다니. 더구나 그 약사는 신심 깊다고 이름난 교회 장로인데. 이게 도대체 어찌된 까닭인가.
은 결국 “삶이란 이해 가능한 대상인가”를 질문하는 영화다. 이창동 감독 4년 만의 복귀작이자 올해 칸 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으로 관심을 모은 이 작품의 외피는 송강호·전도연 두 스타 배우의 멜로 드라마. 하지만 그 속에서 도돌이표처럼 반복하는 물음은,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본질적 의문이다. 인간은 과연 진실을, 타인을, 그리고 신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인가. 끝없는 노력과 욕망에도 불구하고 최종적 해답은 결국 주어지지 않는 것인가. 각각의 대답은 관객이 직접 찾아야 할 몫이겠지만, 이창동 영화에 해피엔딩은 비집고 들어설 틈이 없는 듯하다.
- ▲ 비밀의 햇볕 아래 밀양은 눈부시다. 밀양의 의미를 묻는 신애(전도연)에게, 종찬(송강호)은“우리가 뜻 보고 삽니까. 그냥 사는 거지”라고 답한다. 넉살 좋은 사내의 위로가 신애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 시네마서비스 제공
- 영화는 신애가 가는 곳이면 늘 감초처럼 따라다니는 넉살 좋은 카센터 사장 종찬(송강호)의 시선을 쫓는다. 신애의 유혹에 못 이겨 순간적으로 그녀를 보듬었던 약사(마지막에는 신앙을 이유로 섹스를 포기한다)와 달리, 초지일관 신애를 따라다닌 순정의 노총각이다. 둘의 캐릭터는 극과 극. 죽은 남편 고향이라는 이유 하나로 생면부지의 밀양을 찾아온 신애가 영혼에 굳은살까지 박인 상처 많은 여자라면, 종찬은 정반대다. 배달 나온 다방 여종업원 치마 속 훔쳐보는 게 특기고, 면박과 구박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이곳·저곳에 얼굴을 들이미는 염치 좋은 사내. 어쩌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속물이고, 그래서 더욱 정이 가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특별한 미학적 허세 없이 이야기 전달에 충실하던 이 멜로드라마가 전환점을 겪는 계기는 신애 아들의 유괴. 엄마에게 삶의 존재 이유였던 이 어린 소년은 자신이 다니던 웅변학원 원장에게 납치를 당하고 결국 목숨까지 잃는다. 감독이 좀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발언을 드러내는 것도 이 대목부터다. 예상외로 신앙에 귀의하는 신애, 살인마를 용서하겠다는 어려운 결심, 그리고 마침내 교도소를 찾았을 때의 충격. 그 천인공노할 유괴범은 너무나 해맑은 얼굴로 “나도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나 이미 용서를 받았다”고 간증했던 것이다. ‘밀양’은 현실과 신앙 모두에게서 배반당하고 분열을 겪는 신애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석규(‘초록 물고기’) 설경구(‘박하 사탕’) 문소리(‘오아시스’)에게서 각각의 최고 연기를 이끌어냈던 이창동 감독은, 이번에는 송강호와 전도연이라는 당대의 명배우를 통해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캐릭터를 축조해냈다. 가끔은 통역이 필요할 만큼 밀양 사투리를 걸쭉하게 구사하며 투박한 사내를 살아낸 송강호와, 순진함과 요염함, 분열과 공포를 한 얼굴에 담아낸 전도연은 지금까지 이들이 쌓은 명성이 허명이 아님을 다시 한 번 입증한다.
이 두 명의 스타를 제외하면 ‘밀양’의 거의 모든 배우는 낯선 얼굴들이다. 울산과 대구 등 지역 연극무대 출신과 오디션을 통해 새로 뽑은 연기자다. 우리 주변 필부필부(匹夫匹婦)로 보이는 이 조연들의 열연은 새삼 관객을 각성시킨다. 삶에 관한 고통스런 질문은 관객인 우리 역시 피해갈 수 없다고. 영화 마지막 신애의 친정 남동생이 이 자그마한 소도시를 찾았을 때, 그는 깍쟁이 같은 서울말로 묻는다. 밀양은 어떤 곳이냐고. 종찬은 “뭐 딴 데하고 똑같지요. 사람 사는 데 다 똑같지”라고 퉁명스런 사투리로 받는다. 스크린 위로 빽빽할 만큼 쏟아지는 햇빛(密陽)을 보고 있자니, 현기증이 인다. 삶은 얼마나 불가해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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