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 홍랑의 지독한 사랑
묏버들 가려 꺽어 보내노라 임에게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
임에게 보내는 간곡한 사모의 정을 버드나무 가지를 빌어 표현한 이 시조는 얼마 전까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 바로 이 시조를 홍랑이 지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과연 홍랑은 누구를 위해서 이 시를 쓴 것일까?
KBS 역사스페셜에서 이 연시에 담긴 사연을 찾았다.
2000년 11월 , 조선시대 중엽의 대표적인 연시로 꼽히는 홍랑의 시 원본이 공개됐다. 한국 근대 최고의 서화 감식안을 꼽히는 위창 오세창(1864-1953)의 집안에 내려오는 서첩에 가람 이병기가 썼다는 발문과 함게 수록돼어 있었다.
이병기를 비롯한 국문학자들이 홍랑의 시를 높이 평가하는 까닭은 이별과 관련된 시는 많지만 이만큼 멋이 살아 있고 낭만적인 작품은 흔치않다는 것 때문이다.
홍랑이 그처럼 사랑한 사람은?
선조 때의 시인 고죽 최경창(1539-1583)이 바로 홍랑의 연인이다. 최경창은 1573년 가을 함경북도 경성 - 서울에서 천리길이 훨씬 넘는 변방 - 에 북도평사로 부임한다. 조선시대 기녀와 양반의 관계를 연구해온 조강국 박사에 의하면, 당시에 변방에 부임한 관리가 가족을 데려가지 않고 혼자 간 것은 군사활동에 전념하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대신 변방 사졸들에게 배치되는 방직기(바느질, 빨래 등 군사들의 수발을 맡았고 심지어는 잠자리 시중까지 들었다. 현지에 있는 처의 역할)라는 기녀가 있었다.
고죽 최경창은 당대의 문인인 송강 정철등과 교류하면서 조선중기 8문장으로 불렸다고 한다.
시와 풍류를 아는 젊은 관리 최경창과 재색을 겸비한 경성의 이름난 기생 홍랑은 곧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그러나 지방 관리와 기생의 사랑에는 애초부터 한계가 있어 임기가 끝나면 사랑도 지속되기가 어려웠다. 조선 시대 기생은 노비 신분이어서 해당 지역을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갈 수없었다.
경성에서의 임기를 마친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면서 두 사람의 이별도 불가피했고 이별의 슬픔 속에 홍랑은 마음이나마 고죽 곁에 머물기를 원했을 것이다. 서울로 떠나간 고죽에게 적어보낸 시 한 수에 홍랑이 담아 보낸 것은 간절하고도 지극한 사랑이었다.
다시 한번 읊는다.
묏버들 가려 꺽어 보내노라 임에게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
이렇게 끝난 사랑?
아니다. 이들은 다시 재회를 하고 또 이별한다. 고죽 최경창이 병석에 누운 것을 염려하여 7일 밤낮을 걸어 한양으로 찾아온 홍랑의 행동은 당시의 시대 상황 - 국상, 당쟁 등-으로 인해 최경창의 파직으로 까지 비화되어 경성에서 이별한 뒤 2년 만에 병석에 누운 최경창과 홍랑의 짧은 재회는 파직과 이별로 막을 내리고 만다.
고죽 최경창은 당대의 학자 문인들로부터 인정받을 정도로 고고한 성품을 지녔고, 파직을 감수하면서까지 한 여인을 사랑했다. 최경창과 홍랑의 사랑은 파직과 이별, 죽음으로 이어지는 시련 속에서 오히려 더 피어날 수 있었다.
홍랑의 일로 파직당한 최경창은 변방의 한직으로 떠돌다가 선조9년(1583년)마흔 다섯의 나이로 객사하고 만다. 명문가에 태어나 당대에 이름을 날린 문장가로서는 쓸쓸하기 이를 데 없는 죽음이다.
홍랑은 고죽과의 마지막 이별을 어떻게 받아 들였을까?
노류장화와 같이 누구나 꺽을 수 있다고 여겨진 기생이 주위의 협박과 유혹을 물리치고 수절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홍랑은 스스로 얼굴에 상처를 냄으로써 다른 남자의 접근을 막아 고죽의 무덤을 지켰다. (3년의 시묘살이) 홍랑이 신분의 한계속에서도 절개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이 처럼 지극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3년상을 마치고도 무덤을 지키던 홍랑은 전쟁이 일어나자 어쩔 수 없이 피난길에 오르는데 고죽이 남긴 시를 모두 정리해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조선시대 뛰어난 시인인 고죽의 시가 지금까지 전해지게 된 것은 이 같은 홍랑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홍랑이 죽고 난 뒤, 해주 최씨 문중은 그녀를 한 집안 사람으로 여겨 장사를 지내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바로 아래 홍랑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도 대를 이어 전해왔고,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예를 갖춰 홍랑의 묘를 돌보고 있다. 기생 홍랑의 신분의 차이와 죽음의 이별을 극복하고 고죽의 곁에 머물게 된 것은 후세의 마음까지도 감동시킨 지극한 사랑때문이다.
<역사스페셜 5 미스터리 인물들의 숨겨진 이야기>에서 발췌 요약 정리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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