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구원은 자각과 분투로 정복하는 자유의 고원이다.

노래에 살고

파두

rouman 2007. 5. 31. 02:10

 

어느 비오는 저녁  촉촉히 젖은 보도 위를 기분 좋게 달리며, 나는 애잔한 감상에 젖어들고 있었다.

그때 FM에서는 아말리아 호두리게스의 파두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파두의 여왕'이라 불리기도 하고 또한 '포르투칼의 에디뜨피아프'라 불리워지기도 한다.

리스본에서는 도시의 카페 스타일의 음악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그리스의 렘베티카나 블루스,

그리고 오리지널 탱고와 상응하는 스타일의 음악이라 하겠다.  

나는 지금 포르투칼의 어느 카페에서 흐르는 파두의 환청을 느끼고 있다.  또한 그 카페의 분위기를 꿈꾸고 있다.

 

파두(Fado)  

 

파두는 '숙명'을 뜻하는 라틴어 파툼(fatum)에서 파생되었다. 파두는 1870년 리스본의 알파마 지구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음악이다. 외국인들에게 포르투갈 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두 가지다. 미술에서는 타일에 그림을 그린 화사한 ‘아줄레주’,그리고 음악에서는 바로 포르투갈 전통음악 ‘파두’다. 포르투갈인 들에게 파두가 갖는 의미는 음악 이상이다. 우리에겐 아직도 생소하지만 파두는 지금 전 세계 음악계에서 무척 사랑받고 있는 중요한 음악이자 포르투갈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파두는 흔히 무척 슬픈 노래로 알려져 있지만 파두가 꼭 슬픈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슬픈 파두이건 경쾌한 파두이건 내용은 모두 슬픔을 노래한다. 그 이유는 바로 파두의 바탕에 우리의 ‘한’과 비슷한 정서인 ‘사우다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사우다드는 우리 말로   옮기면 ‘슬픔’의 정서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그렇다면 포르투갈인 들은 왜 슬픔을 지닐 수밖에 없었을까.그 이유는 바로 포르투갈의 슬픈 역사에서 비롯됐다.  

국토의 절반을 대서양과 접하고 있는 포르투갈의 지리적 특성도 파두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바다는 포르투갈인 들에게 정복해야 할 대상이자 동시에 희망을 갖게 하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 먼 바다에서 느끼는 조국에 대한 그리움, 인생, 영원한 사랑 등 뱃사람들의 이야기는 모두 파두의 가사가 됐다.

이런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포르투갈인 들에게 ‘슬픔’은 숙명처럼 자리 잡았고, 이는 파두로 이어졌다. 우민화정책인 이른바 ‘3F정책’도 파두가 유행하는 데 한몫했다. 3F정책은 축구(football), 성모 마리아가  현신했다는 가톨릭 최대의 순례지인 파티마(Fatima), 그리고 파두(fado)등의 세 가지를 장려해 국민의 관심을 정치에서 떼놓으려 한 것이었다.

파두는 아랍의 지배를 받았던 포르투갈의 역사 속에서 태어났다. 포르투갈은 711년 무어인(7세기 중반 북아프리카지역을 침략한 아랍계 이슬람교도들)의 침략을 받은 뒤 이후 약 550여 년 동안 아랍문명의 지배를 받았다. 그래서 다른 유럽지역과는 달리 아랍적인 지역문화가 생겨났다. 파두에서 나타나는 비장함과 경건함, 꺾이는 창법은 모두 아랍의 영향을 받은 흔적들이다.

포르투갈의 수도인 리스본은 항구도시로 옛날부터 많은 서민들의 애환이 어우러지는 장소였다. 그래서 리스본 파두는 소박한 서민의 생활이 투영된 것이 특징이다. 에 의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2박과 4박의 단순한 형식이며 아무래도 단조가 많으며 코드 또한 결코 복잡하지 않다. 그러나 미묘한 싱커페이션(당김 음)에 가락은 섬세해 가수의 노래솜씨에 따라 풍부한 정취를 불러일으킨다. 아말리아 호드리게스의 업적이 바로 이것이다.

파두의 역사 속에서 반드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파두의 여신’으로 불리는 마리아 세베라다. 오랫동안 대중과 무명시인들의 입에서 전해 내려오던 파두가 19세기 들어 비로소 대중의 인기를 얻게 된 데는 마리아 세베라(1820∼46)의 출현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파두 가수이면서 거리의 여자였던 마리아는 귀족인 비미지우 백작과 사랑에 빠졌지만 신분을 뛰어넘지 못한 채 스물여섯 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서민의 음악 파두를 귀족사회에 보급했던 그를 애도하며 이후 모든 여자 파두가수들은 그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검은 숄을 걸치고 노래하는 전통이 생겼다. 그리고 이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파두의 여왕’  아말리아 호드리게스(Amalia Rodrigues/1920∼99) 마리아 세베라 이후 파두를 더욱 성숙시킨 중요한 인물로는 아말리아 호드리게스가 있다. ‘파두의 여왕’으로 불린 아말리아 호드리게스는 파두를 국제적으로 알리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뮤지션이다. 또한 단순하고 순박했던 파두의 가사를 시적인 내용으로 끌어올린 주역이기도 했다. 호드리게스는 무대 위에서 언제나 검은 옷을 입었는데, 그게 나중에는 ‘아말리아풍’으로 하나의 유행이 되기도 했다. 지난 99년 10월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수많은 팬들이 슬퍼하며 운구 행렬을 따랐을 정도로 포르투갈인 들의 사랑을 받았다.

 

# 파두의 집(카사 데 파두)             
파드를 들을 수 있는 곳이 카사 데 파두라 불리 우는 파두 레스토랑으로 리스본 시내 알파마 지구와 바이루 알투지구에 집중되어 있다. 파두의 가수(파디스타로 불린다)는 많은 청중을 상대하지 않고, 관중과 무대가 일체되는 소규모 공연장에서 공연한다. 반주는 보통 파두의 애절한 정서를 결정하는 포르투갈의 전통 기타인 12현 '기타하'(guitarra)와 비올라 베이스 등 세 악기로 구성된 밴드가 맡으며 흔히 검은 옷을 입는 파두 가수는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고 육성으로 노래한다.

 

http://blog.daum.net/kkss1/11360300  (파두 서정적인 분위기의 민속음악)

http://blog.daum.net/kkss1/11360300  (파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