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구원은 자각과 분투로 정복하는 자유의 고원이다.

일본 문화/한일문화

혼자 먹는 도시락

rouman 2007. 5. 2. 21:08
■ 임우진
秋田県 현청 근무 국제교류원

일본의 대표적인 도시락 전문점
'ほっかほっか亭'. 점심시간이 되면
도시락을 사려는 직장인들이 줄을
지어 늘어선다
일본은 도시락 산업이 발달한 나라이다. 수 많은 도시락 체인점이 있고 편의점에서도 다양한 종류의 도시락을 판매하고 있다. 또 백화점 식품매장도 도시락이나 반찬류, 전통과자, 튀김 등, 바로 먹을 수 있는 즉석 음식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일본인의 식생활이 다양화됨에 따라 도시락, 즉 '弁当'의 종류도 다양화되어 왔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전국 각지의 기차역에서 판매하는 '駅弁'이다. 한 통계에 의하면 현재 일본에서 시판되고 있는 도시락의 종류는 2천 여 종이 넘는데, 그 중 대부분을 駅弁이 차지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주요 교통수단으로 버스보다 철도를 주로 이용한다. 이는 오키나와를 제외한 일본 전국을 기차만으로 여행할 수 있을 정도로 철도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각 역마다 본고장에서 재배한 쌀과 특산물을 이용해 만든 駅弁이 여행객들을 유혹한다. 일본인들에게 駅弁은 단순히 식사를 간단히 때우기 위한 도시락이 아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감상하면서 그 지방의 자연과 풍토, 인정을 접하게 해주는 좋은 추억거리인 것이다.
駅弁의 기원은 1885년경, 栃木県에 있는 宇都宮라는 역에서 梅干し(매실 절임)를 넣은 주먹밥을 대나무 잎에 싸서 たくあん(단무지)을 곁들여 팔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격한 경제성장과 함께 일본 국민들의 생활이 윤택해지고 여행과 레저 문화가 발달했다. 그러면서 駅弁의 수요도 자연히 급증해, 오늘날에는 도쿄역에서만 연간 600만 개의 駅弁이 팔려나가고 있다고 한다. 대도시에 있는 대형 백화점에서는 종종 전국의 駅弁을 한데 모아 판매하는 행사를 여는데, 각지의 유명한 駅弁을 맛보려는 수많은 인파들로 언제나 대성황을 이룬다. '駅弁マニア'도 있다. 일본의 웹사이트를 검색해보면 駅弁을 먹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기차역을 찾아다니는 마니아들의 홈페이지를 다수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기차역에서 파는 도시락이 '駅弁'이라면, 공항에서 파는 도시락은 '空弁'이다. 空弁은 몇 년 전, 도쿄 외곽에 있는 국내선 공항인 하네다공항에서 팔기 시작해, 항공기 이용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밖에도 가부키나 스모와 같은 일본의 전통공연장에서 판매하는 '幕の内弁当', 봄철에 벚꽃놀이를 가서 야외에서 먹는 '花見弁当' 등, 다양한 종류의 도시락이 있다. 일본인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도시락을 하나의 문화로 끊임없이 발전시켜온 것이다.
일본에서 도시락은 하나의 문화다. 이어령 씨는 『축소 지향의 일본인』이라는 책에서 일본의 도시락은 밥상의 축소형이라고 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일본의 도시락을 보고 있자면 그 말을 수긍하게 된다. 또한 일본의 도시락에서는 일본인의 실용성과 절약정신도 엿볼 수 있다.
도시락의 초기 형태는 밥을 말려서 가지고 다녔던 '干し飯'였다고 한다. 말린 밥에 뜨거운 물을 부어서 먹었는데, 물이 없을 경우에도 그대로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전국시대에 무사나 여행자들에게 매우 요긴한 식량 구실을 했다.
아키타현 오다테역에서 파는 駅弁
'鶏めし弁当'.1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
하는 명물 도시락이다
이제는 도시락이 꼭 야외에서 먹는 음식이라는 인식은 사라졌다. 맞벌이 가정이 증가하면서, 직장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집 근처의 도시락 전문점이나 슈퍼마켓에 들러 가족의 저녁식사용으로 도시락을 사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 물론 직장에서도 점심으로 도시락을 먹는 사람들이 많다. 필자가 근무하는 현청에서도 점심시간 10분 쯤 전이 되면 여기저기서 ꡒお弁当買いに行こう!(도시락 사러 가자!)ꡓ ꡒ今日、お弁当頼む?(오늘 도시락 배달시킬 거야?)ꡓ 등의 대화들이 오고간다.
필자는 현청 첫 출근 날 경험했던 살풍경한 점심시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관광과 직원 앞에서 인사를 하고 점심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한 여직원이 다가와서 지하매점으로 도시락을 사러 갈 건데 같이 가지 않겠냐고 하는 것이었다. 내 머릿속에는 '도시락'은 학교 점심시간에나 먹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어서, 도시락을 사러 가자는 말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직원을 따라간 매점에서 도시락 하나를 골라 사무실로 돌아오니, 외식을 하러 나간 몇몇 직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직원들이 각자 자기 자리에 앉아 조용히 도시락을 먹고 있는 것이었다. 그 많은 직원들이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며 말도 없이 '혼자서' 도시락을 먹는 것이다!
동료 직원의 말에 의하면,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직원들이 집에서 도시락을 싸오거나 사서 각자의 책상에서 먹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점심을 먹고 현청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는데, 거기서도 혼자 벤치에 앉아 도시락이나 빵을 먹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이 내게는 너무나도 생소할 뿐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즐거워야 할 식사시간이 내게는 오히려 너무 지루하고 재미없는 시간이 되었다. 야근을 할 때도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가지 않고 빵이나 과자 등을 사와 간단하게 때우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 같으면 이런 사람에게 '맛있는 거라도 먹어가면서 해.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라고 충고할 텐데 말이다.
오늘날 이처럼 일본인들이 도시락을 애용하는 것은 아무래도 장기불황이라는 경제상황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점심을 식당에서 사 먹을 경우 적어도 800엔(약 9천 원) 이상이 지갑에서 빠져나간다. 반면, 도시락 전문점이나 편의점에 가면 싸게는 300엔, 비싼 것은 600엔 정도면 따끈따끈한 도시락을 살 수 있다.
그런데 혼자 먹는 것은 도시락뿐이 아니다. 덮밥이나 회전초밥, 라면 가게 같은 곳에 가도 혼자 식사를 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한국인에 비해 일본인들은 혼자 음식을 먹거나 혼자 행동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적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직장인의 경우에는 하루 종일 회사에서 인간관계에 신경 쓰며 생활하다보니, 최소한 점심시간만이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다, 남들에게 맞추지 않고 자신만의 페이스로 식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아기자기하고 예쁜 도시락은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지만, 도시락이 주는 개인주의는 외롭게 만들기도 한다. 벚꽃을 구경하며 여럿이 둘러앉아 먹는 도시락은 삶의 여유를 느끼게 해주지만, 시간에 돈에 쫓겨 먹는 편의점 도시락은 삭막한 현대 일본인의 단면이기도 하다.